의사와 열사 차이, 독립운동가 김상옥,김원봉, 의열단

영화 밀정의 초반부 쌍권총을 들고 일본 경찰과 전투를 벌인 김장옥(박희순)이란 인물의

모티브가 되었던 김상옥 의사의 생애와 의사와 열사의 차이점,

김상옥 의사가 활동했던 의열단에 대한 포스팅입니다.

⊙의사와 열사의 차이점

안중근 의사, 유관순 열사, 윤봉길 의사 등 독립운동에 몸을 바쳐 희생하신 분들에 대한

호칭은 약간 다르게 사용됩니다.

가끔 신문 기사나 다른 글들을 보다 보면 여기에 대해 헷갈려하시는 거 같아

본격적인 포스팅에 앞서 의사와 열사의 차이점에 대해 짚어보겠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열사 : 나라를 위하여 절의를 굳게 지키며 충성을 다하여 싸운 사람

의사 :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제 몸을 바쳐 일하려는 뜻을 가진 의로운 사람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일부 신문기사나 일부 글들에서는 무력의 사용여부에 따라 의사와 열사를 나눈다고 합니다.

국립국어원에 찾아가 해당 내용을 찾아봤습니다. 공식적인 입장은

출처 : 국립국어원

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고하시면 될 듯합니다.

(캡쳐해 놓고 보니 글자가 잘 안보이네요. 요약해보자면

의사, 열사를 구분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으므로, 독립유공자로 표기하고, 순국열사와 애국지사로 구분한다는

내용입니다.)

즉, 사회적 통념상의 구분일 뿐 아직까지 보훈처나 국립국어원의 공식적인 구분법은 아닙니다.

방송이나 신문기사에서도 무력사용 여부의 차이다라고 방송을 하던데,

요건 개인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 독립운동가 김원봉

1. 약력

1889년 출생(일부 전기나 자료에서는 1890년생이라고 되어있습니다, 호적상 1889년 1월 5일)

본관은 김해이며, 기독교인이며,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전 철물점을 운영했었습니다

3.1 운동 직후부터 독립운동을 시작하여, 혁신단을 결성, 혁신 공보를 발행 하였습니다.

이후 상해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습니다.

1923년 1월 22일 약 1천 명의 일본 군경과 총격전을 벌이다 총알이 다 떨어지자 자결하였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

영화 밀정 중

2. 종로경찰서 폭탄 투하 사건

여기에는 조금 논란이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1922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많은

일본 경찰을 죽였다고 주장하고, 또 따른 일부에서는 그 당시 종로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의 총독 사이코 마코토를 암살하기 위해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경계심을 갖게 할 필요가 없었다는 주장도 제기되며,

실제 같은 의열단원들도 김상옥이 한 일이 아니라는 주장을 법정에서 하기도 했습니다.

일본 경찰에서도 김상옥 의사와의 총격전 이후 종로경찰서의 폭탄 투척 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확실치 않다는 발표를 하기도 했습니다.

종로 경찰서 폭탄 투하 사건과는 별개로 김상옥 의사는 많은 일화를 남기며,

독립운동의 최전선에 섰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입니다.

조선물산 장려운동, 혁신단 조직, 친일민족반역자 총살, 오성 헌병대 분소 습격,

악질 일본 경찰 다무라 사살, 등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3. 마지막 전투

마지막 전투에 대한 상황은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 잘 표현되어 있어 가져왔습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약 1,000여 명의 일본 경찰에 포위되었다는 얘기도 있고, 400명과 전투를 벌였다는 얘기도 있고

약간씩은 차이는 있지만 많은 수의 일본 경찰과 단신으로 대적했던 것만은 사실인 듯하고,

사후 몸에 11발의 총상이 발견되었다는 점을 볼 때 엄청난 전투력을 보였던 듯합니다.

⊙ 의열단

의열단은 1919년 11월 9일 중국 길림성에서 신흥 무관학교 출신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무장독립운동단체입니다.

비폭력 독립운동인 3.1 운동을 일제의 폭력으로 인해 실패했다고 보고, 무장으로 폭력에 대항하는 것만이

독립을 이룰 수 있는 방법으로 생각하여 생겨난 단체입니다.

단장은 최근 화제가 됐었던 약산 김원봉이며, 부산경찰서장을 폭사시킨 박재혁,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최수봉,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한 김익상, 위에 언급한 김상옥,

김병현, 김광추, 박희광, 이종암, 오셩륜, 나석주, 김지섭 , 나석주, 등이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 총영사의 내부문서에는 약 천여 명의 단원이 소속된 걸로 표현되었으며,

영국의 기밀문서에서는 2천 명에 달한다고 보고되었습니다.

공식적인 단체로써의 활동은 1926년 김지섭의 도쿄 거사를 끝으로 보고 있으며,

이후의 활동은 의열단원들의 개별 활동으로 보고 있습니다.

1926년 의열단의 핵심 멤버들이 군사적이고 전략적인 조직의 필요성을 느껴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하면서 공식적인 의열단은 해체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후 주요 인물들이 황포군관학교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면서 중국 공산당으로서의

활동을 하고, 해방 이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공산당원으로 활동하며,

(남한 임시정부와의 갈등 등의 원인이라는 논란도 있으나, 정치적인 문제이고,

명확한 사실 관계가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요 문제는 넘어가겠습니다)

공산당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이던 국내의 정서와

상해 임시정부와 상당한 대립각을 세웠던 점 등의 이유로.

최근까지도 의열단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었습니다.

최근 들어 의열단에 대한 재평가와 사실 확인이 좀 더 활발해진 듯 하니

조금씩 그들의 활동과 공과 과에 대한 평가는 정확히 이루어지리라 생각합니다.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의열단원들이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노력하였다는 것일 겁니다.

이 자리를 빌어 과거 독립운동을 했던 모든 조상님들과 현재 일본 불매운동 등을 통해

경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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